2006년에 시작된 중국 생활은 2013년 8월에 마침표를 찍고 인도네시아로 넘어갔다. 중국에서의 생활은 나름 만족스러웠지만,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에서는 외국인이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는 것이 쉽지 않았고, 한국인의 입지도 점차 좁아지고 있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인도네시아로 이주한 것은 정말 잘한 결정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주 후 4년 뒤 중국에서는 사드 보복 조치로 심각한 한한령이 시작되었고, 많은 한국 기업들이 철수했다. 당시 남아있던 몇 안 되는 한국인 친구들도 모두 귀국했다.
처음부터 인도네시아로 이주를 계획한 것은 아니었다. 내가 근무하던 중국 게임 회사는 이미 한국에 지사를 설립한 상태였고, 나는 한국 지사로 파견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있었다. 당시 지사장으로 발령 난 상사도 나를 좋게 평가했기에 한국으로 나가는 것은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인도네사아 이주를 결정하게된 이유!
그러나 최종적으로 인도네시아로 이주하기로 결정한 이유는 한국 사회의 동남아 여성에 대한 편견 때문이었다. 당시 한국에서는 동남아 여성과 결혼하는 남성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이 많았다. 주로 시골의 노총각들이 젊은 동남아 여성을 데려와 국제결혼을 한다는 고정관념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물론 모든 동남아 출신 사람들이 차별받으며 사는 것은 아니었지만, 인도네시아인 아내와 앞으로 태어날 다문화가정의 2세가 대한민국에서 외국인에 대한 편견과 차별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부담이 컸다. 실제로 다문화 가정의 자녀들이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는 사례도 뉴스에서 종종 접할 수 있었다.
2012년, 여자친구와의 결혼 소식을 주변 한국사람들에게 전했을 때의 반응은 충격적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리의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지만, 일부 지인들의 질문은 어이없을 정도로 편견에 가득 차 있었다.
“인도네시아 현지인이야? 피부가 많이 검어?”
“인도네시아 왕족이야? 부자야?”
“인도네시아? 그게 어느 나라야? 가난한 나라 아냐?”
이런 질문들은 상식적으로 한국인과 결혼할 때는 결코 받지 않을 질문들이었다. 어떻게 만났는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질문 보다는 신기한 외국인에 대한 궁금증이 더 컸던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편견 또한 점차 사라지고 있다고 본다. 현재 대한민국은 인구 감소가 매우 심각한 상황이고, 오히려 외국인 이민자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입장이 되었다. 외국인 노동자들은 대한민국 경제에 큰 도움을 주고 있으며, 그들의 역할은 앞으로 더 중요해질 것이다.
당시 아내에게 이런 말을 했었다.
“난 사막에 떨어져도 살아남을 사람이니까, 걱정 말고 네가 가고 싶은 나라로 가자!”
사직서를 제출하다.

이외에도 여러 고민이 있었지만, 결국 인도네시아로의 이주를 결정하게 되었다. 2013년 초에 이주를 결정하고 2월부터 본격적인 준비를 시작했다. 6개월이면 충분한 시간이라고 생각했고, 회사에도 이미 6개월 전에 퇴사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해당 업계에서 대체 인력을 구하는 것이 쉽지 않았기에 대체 인력이 구해질 때까지 계속 업무를 이어갔다. 당시 퇴사 소식을 들은 직장 상사는 이렇게 말했다.
"퇴사 한 달 전에 사직서를 내는 게 보통인데, 6개월 전에 미리 사직서를 제출하는 경우는 처음이네요."
나는 ESTJ다. 냉정하고, 이성적이고, 계획적인 성격이라 그런가보다.
너무 많은 물건들 언제 다 정리하지?

정리할 물건이 너무 많았다. 중국에서 4년간 유학 생활을 마치고 4년을 더 일했다. 특히 유학 생활이 끝나면서 한국으로 귀국한 친구들이 남겨둔 물건들이 많았다. 집에는 가구와 전자제품 등 물건들이 쌓여 있었고, 이를 처분하는 데도 시간이 오래 걸렸다. 다행히 중고 거래로 물건을 팔아 번 돈은 인도네시아 이주에 큰 도움이 되었다. 당시 다음카페에서 한국인들 간의 중고 거래가 활발했는데, 일부 물건은 구매 가격 그대로 팔기도 했다. 특히 유학생들 사이에서는 주방용품 세트를 통째로 사 가는 경우가 많아 물건을 쉽게 처분할 수 있었다.
처분할 짐들을 모두 정리하고 나니, 인도네시아로 보내야 할 짐이 우체국의 가장 큰 박스로 네 상자나 나왔다. 다행히 집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 우체국이 있어서, EMS 국제 택배를 이용하기로 했다. 아내와 함께 힘겹게 짐을 운반용 수레에 싣고 우체국으로 향했다.
우체국에 도착해 국제 배송 서류를 작성하고 발송하려는 순간,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우리 우체국에서는 이 물품들을 보낼 수 없습니다."
"왜요? 무슨 문제가 있나요?"
"브랜드 의류는 구매 영수증이 필요합니다."
나는 당황해서 답했다.
"브랜드 의류요? 그런 건 없는데요."
평범한 대학생인 내가 고가의 브랜드를 살 돈이 어디 있겠는가? 그들이 말하는 ‘고가의 브랜드’는 나이키, 아디다스, 뉴발란스처럼 흔한 스포츠 브랜드였다. 한참 실랑이를 벌였지만, 싸워봐야 소용없겠다고 판단했다. 결국 한국인 커뮤니티에 문의해보니, 다른 우체국에서는 아무 문제 없이 국제 택배를 보낼 수 있었다는 정보를 얻었고, 그 지점을 찾아가 무사히 발송할 수 있었다.
사실 우리 부부가 중국을 떠나기로 결심한 이유 중 하나도 이런 '불친절함'이었다.
함께 이주한 2마리 반려견

반려견도 함께 이주했다. 인도네시아인 아내와 연애할 때부터 함께 기르던 코카스파니엘과 푸들, 두 마리의 강아지가 있었다. 하지만 이들을 인도네시아로 데려가는 과정은 매우 복잡했다. 우리 두 사람의 비행기 표보다 강아지 두 마리를 데리고 들어가는 비용이 더 많이 들었다. 광견병 접종, 검역소 검사, 인도네시아 검역국 승인, 반려견 동반 항공권 발급, 탑승 수속 등 다양한 절차를 거쳐야 했다.
강아지들의 스트레스는 상당했다. 출국 전부터 신경안정제를 준비해 갔고, 검역소에 맡기는 순간부터 강아지들의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자카르타 공항에 도착할 때까지 거의 10시간 동안 짖었을 정도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자카르타에 도착했다. 20대를 중국에서 보내고, 30대에 자카르타에서 새 출발을 하게 된 것은 설레고 흥미로웠다. 이제 인도네시아에서의 새로운 삶을 시작하며, 본격적인 생활 이야기를 써내려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