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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8월 자카르타 국제공항 도착

category 에세이 2024. 11. 27.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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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이 지난 지금도 적응이 안 되는 것이 하나 있다면 바로 7시간이 넘는 비행 시간이다. 베이징-서울 간 비행은 약 2시간 10분으로, 서울에서 고향 울산까지 가는 시간보다도 짧다. 비행기에서 꿀잠을 자는 사람들을 보면 그저 부럽기만 하다. 많은 이들이 밤 비행기에서 잠을 푹 자고 나면 목적지에 도착한다고 쉽게 얘기하지만, 비행기에서 잠을 못 자는 나에게는 7시간의 비행이 그야말로 지옥과도 같다. 지금도 비행기를 타면 항상 똑같은 생각을 한다.

'술이나 왕창 마셔야지.'

인도네시아로 이주하기 전, 자카르타를 한 번 방문한 적이 있었다. 자카르타 공항에서 받은 첫인상은 마치 시골의 어느 넓은 광장에 온 듯했다. 국제공항임에도 불구하고 일부 구역을 제외하곤 에어컨이 거의 나오지 않았다. 베이징의 8월 날씨 또한 만만치 않게 더웠기 때문에 자카르타의 더위도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다. 베이징은 한여름에 기온이 40도까지 오르기도 하니까. 인터넷으로 알아본 자카르타의 날씨는 아무리 더워도 32~35도 정도라 하니, 그 정도라면 견딜 만하다고 여겼다.

하지만 두 지역의 더위는 사뭇 달랐다. 베이징은 매우 건조해서, 기온이 40도까지 올라가도 바람이 솔솔 부는 그늘에만 있으면 시원함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자카르타의 더위는 전혀 달랐다. 국제공항에 도착한 순간, 기온보다는 습기로 인한 답답함이 온몸을 휘감았다. 땀이 멈추지 않고 흐르면서 불쾌지수가 치솟았고, 더위와 습기 탓에 짜증이 가득해졌다. '빨리빨리'에 익숙한 한국인으로서 그 덥고 습한 환경은 그야말로 참기 어려운 경험이었다. 당시 나는 깊은 한숨만 계속 내쉬었다.

“하… 후… 흠…”

그때 자카르타 국제공항의 모습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당시의 수카르노하타 국제공항(Bandara Internasional Soekarno-Hatta)은 터미널 1과 터미널 2 두 곳뿐이었고, 터미널 1은 국내선 전용이었다. 국제선 승객들은 터미널 2로 입국했는데, 이 터미널은 1991년에 완공된 건물로 이미 20년이 넘은 낡은 시설이었다.

습기와 냄새, 그리고 전체적인 환경이 모두 불편했다. 오래되고 낙후된 건물 곳곳에는 선풍기들이 설치되어 있었지만, 습한 바람만 내뿜을 뿐이었다. 무엇보다 참기 힘들었던 것은 공항 전역에 스며든 특유의 냄새였다. 카펫 바닥에서는 인도네시아 특유의 정향 담배 냄새가 진하게 풍겼다. 다만, 공항 내 일부 구역은 깨끗하고 에어컨 시설이 잘 갖춰져 있어 쾌적함을 느낄 수 있었다.

2015년에 촬영한 자카르타 국제공항 2터미널 모습


하지만 10여 년이 지난 현재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2016년 새로 지어진 터미널 3 덕분에 이제는 최신식 시설을 갖춘 공항을 경험할 수 있고, 터미널 2도 여러 차례 리모델링을 거쳐 국제 비즈니스 도시의 공항답게 발전했다. 물론 아직도 개선할 부분이 많지만, 10년 사이에 이렇게 바뀔 수 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인도네시아의 수 많은 미스떠르(Mr)
인도네시아에서 '미스떠르'는 정말 흔한 말이다. 공항에서 입국 수속을 마치고, 동반한 반려견까지 계류장에 맡긴 후 장인어른을 만나러 나가려던 참이었다. 그때 짐을 카트에 싣는 동안 누군가 다가와 나를 도우려 했다. 인도네시아어를 모르는 나는 그들이 반복해서 하는 말 중 ‘미스떠르’라는 단어만 들렸다.

“미스떠르~”

내 짐을 옮겨주는 이들은 공항 직원으로 보이지 않았고, 혹시나 짐을 들고 도망갈까 봐 계속 거절했지만 그들은 미소를 지으며 "미스떠르~"라고 말할 뿐 물러서지 않았다. 내 당황한 모습을 본 아내는 그저 껄껄 웃고 있었다. 결국 그들이 짐을 카트에 싣고 공항 밖까지 함께 해주었고, 아내는 그들에게 5만 루피아(한화 약 5천 원)를 건넸다.

공항 밖을 나오니 또 다른 '미스떠르'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택시 호객꾼들이었다. 어리둥절한 내 표정과 행동만 보고도 내가 인도네시아 초짜임을 눈치챈 듯했다. 계속 내 옆에 다가와 “미스떠르~”를 외치던 그들을 보고 점점 지치기 시작했다. 다행히 아내가 장인어른이 주차한 곳으로 날 안내해 빠르게 공항을 빠져나갈 수 있었다. 몇 번 당해본 후 깨달은 사실이지만, 당시 호객꾼들이 권하는 택시를 탔다가는 미터기가 미친 듯이 올라가거나, 터무니없는 요금을 요구받기 일쑤였다. 그들은 짧은 거리를 운행하면서도 수십 달러, 때로는 백 달러 가까이 부르기도 했다.


이제 이렇게 새로운 제2의 고향, 인도네시아에서의 삶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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